행복이가득한집 -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온다는 구천도사의 부적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본문

▶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온다는 구천도사의 부적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역귀(疫鬼)를 물리치기 위해 '처용(處容)의 화상(畵像)'을 문에 붙였다고 한다. 그것은 역귀가 처용의 아내를 범했을 때, 처용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노래와 춤으로 감복시켜서 역귀는 처용의 화상이 그려진 곳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처용의 설화는 우리 나라에서 부적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꼽는 예이다. 신통술을 부리는 부적에 관한 이야기는 이외에도 많이 있다. 제갈공명이 부적을 써서 동남풍을 불게 하여 조조의 1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나 사명대사가 부적으로 도술을 부린 이야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부적이란 악귀나 잡신을 쫓고 복을 빌기 위해 붉은 색으로 야릇한 글자나 모양을 그린 종이를 뜻한다. 부적은 벽에 붙이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태워서 그 재를 마시는 경우도 있다. 대개 부적은 종교적으로 도교나 불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불교나 도교와 관련을 맺고 있는 무속인들이나 절에 있는 승려들이 주로 부적을 그리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 부적으로 이름이 나 있는 무속인으로는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구천선원의 구천도사 진영자 씨를 꼽을 수 잇다. 그는 주로 도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가 모시는 신은 태상노군(太上老君) 즉 노자(老子)라 한다. 대개의 무속인들처럼 그도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운명적인 힘에 의해 무속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젊은 시절 진영자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모 그룹에 입사하여 중견 사원이 될 때까지 평범한 직장 생활을 했다. 그리고 직장에 다니면서 결혼도 하고 아들까지 낳아 가정 생활도 원만했다. 그런데 삼십 대 후반에 독립하여 인테리어 관련 회사를 운영하면서 그의 삶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이 잘되다가도 끝에 가서는 꼭 깨지고 마는 것이었다. 이 즈음 우연히 한 도인을 만났는데 그 도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전생에 도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길을 가지 않고 팔자에 없는 사업을 하게 되면 거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말대로 결국 그는 파산하고 말았고 기정도 풍비박산이 났다. 이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느끼면서 지리산에 기도하러 들어갔다. 기도에 몰두하던 어느 날, 그는 어두운 밤하늘에서 무수한 별들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고 더벅머리에 머리띠를 두른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신기(神氣)를 받는 과정이었다.

지리산에서의 신비한 경험이 있고 난 후 그에게는 설명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배운 적도 없는 붓글씨로 부적을 술술 그리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뭔가 영험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적을 아무 때나 쉽게 쓰는 것은 아니었다. 부적이란 그냥 그려지는 것도 아니고 부적만 가지고 저절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정화(淨化)의식을 한 후 자시(子時)에 정중한 자세로 기를 모아 부적을 그린다. 때로는 방위(方位)도 따져 가면서 그리며 날짜도 가급적이면 효과가 좋은 갑자일이나 경신일을 택한다. 부적의 형태도 부적을 받는 사람의 운세나 기원하는 내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고 그에 따라 처방을 하듯 부적도 그 사람의 조건에 맞게 그리는 것이다.

어떤 때는 나쁜 살이 낀 것을 풀어 주고 어떤 때는 횡액을 예방하기도 한다. 또한 사업의 운을 기원해 주기도 하고 질병을 고치기도 한다. 심지어는 결혼 운까지도 트이데 해 준다. 실제 그의 부적과 기도의 힘으로 효과를 본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한번은 스물 아홉 살 된 처녀가 찾아 온 적이 있어요. 네 살 때부터 정신 박약의 증상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다닐 때 완전히 미치게 된 거예요. 정신병원에도 다녔지만 낫지 않아서 찾아 왔는데 부적과 함께 천 일 동안 기도를 해서 정상으로 돌아오게 했어요. 섬유 계통의 사업을 하던 분은 사업을 너무 확장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백일 기도를 통해 자금 회전을 원활하게 해 주었지요. 외국인과 국제 결혼한 부인도 찾아 온 적이 있는데 이혼 직전까지 간 부부 사이를 원만하게 화해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올해(수년 전임, 아마도 1996년일 듯) 우리 나라의 운세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별로 좋지 않지만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길 것이라고 했다. 자고로 쥐띠 해에 우리 나라의 운세는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병자호란'도 그렇고 '6.25전쟁'도 쥐띠 해에 일어난 사실을 예로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연초에 가로 66센티미터에 세로 1백 32센티미터의 대형 국태민안 부적을 그려 놓고 올해는 작년처럼 큰 참사가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천지신명께 치성을 올렸다.
 
그의 부적이 얼마만큼 효험이 있는지 과학적으로 증명할 길은 없다. 그것은 부적뿐만 아니라 동물의 뼈나 이빨, 발톱 또는 기이한 모양의 돌 등 복을 빌고 재앙을 쫓는 여러 가지 주술물들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밝히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술물은 선사 시대부터 민간 신앙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으며 오늘날에도 하나의 풍속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풍속을 단순히 미신이라고 배격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과학의 힘은 아직 미흡하기 때문이 아닐까? 첨단 과학의 시대라는 오늘날 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묘 자리를 살피며 집터를 따질까?
 
부적에 대해 연구한 한 민속학자는 부적의 효험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한다. "부적이 효험을 나타내려면 마음가짐이 전제되어야 한다.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려는 간절한 기원을 한 후, 신의 은혜를 입기 위해 덕을 쌓고 경건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부적이 미신이 아닌 민간 신앙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의 시대에도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와 같은 것이 아닐까?